[ 전쟁 ] - 6.25 전쟁
안녕하세요. 지식백과사전입니다. 오늘은 전쟁인 ' 6.25 전쟁 ' 에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개요
6.25 전쟁, 한국전쟁 또는 조선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한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으로, 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한 국제전쟁으로 비화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 간 교전이 이어졌다.
6.25 전쟁의 평화 협정(Peace treaty, 강화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현재까지 진행 중인 전쟁이지만 남북 양측의 시민들은 전쟁 진행중이라고 인식하지는 않는다. 이는 법적으로는 평시(平時)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시(戰時)에 시행되는 비상 법령을 계속 발동하기에는 유례없이 긴 휴전이 지속되고 있는 중이라, 준전시(準戰時)라는 특수한 대치 상태로 구분된다[23]. 남북의 지도자가 전쟁 상대인 적국 원수(元帥)를 만나고 스포츠 행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등의 일도 이러한 특수한 상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6.25 전쟁의 휴전 기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기록을 실시간으로 갈아치우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전개된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한 사례 중 하나로 꼽히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었던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전쟁이다.
한편으로 일본이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하였고, 제2차 국공내전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내몰린 중화민국이 살아나고 침략자로 규정된 중국은 20년 넘게 외교적 고립을 면하지 못하는 등 주변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6.25 전쟁의 침공 동기에 대한 통일된 정설은 아직 없다. 다만, 2010년 이후 국지전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6.25 전쟁을 외적기원(김일성 또는 스탈린의 기획)과 내적기원(내전의 확대)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발생한 것으로 보는 복합기원설이 국제적으로 힘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24]에서 6.25 전쟁에 대한 명확한 원인과 기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이 대립하고 있으며, 주류 역사학계의 정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25]
[2] 명칭
일반적으로 전쟁은 분쟁의 주체, 전투는 발생한 장소를 그 명칭으로 쓴다. 반면 이 전쟁은 (한국 기준으로는) 발발한 날짜가 전쟁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및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공식적으로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민간에서도 관습적으로 날짜-사건을 조합해 6.25 전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영어로는 The Korean War라고 부른다. Korean War라는 이름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전쟁을 주도한 UN군 사령부에서 붙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한국 전쟁'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명칭 외에도 6.25 전쟁을 호칭하는 몇몇 어휘들이 있는데, 가령 북한에서는 조선전쟁 혹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북한은 한국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자신들을 '조선'이라 칭하므로 '조선전쟁'이라 하는 것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조선전쟁 혹은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의 항미원조전쟁(抗(kàng)美(měi)援(yuán)朝(cháo)战(zhàn)争(zhēng))이라고 부른다.[26] 한편 일본에서는 조선전쟁(朝(ちょう)鮮(せん)戦(せん)争(そう))(쵸오센센소오)이라고 부르며 현재 중국도 정식 수교국인 한국을 의식해 항미원조전쟁 대신 조선전쟁이라는 용어를 좀 더 많이 사용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한국(韓國)을 한반도 남반부의 국가(대한민국)에 한정된 의미로 보고 조선(朝鮮)을 '한반도' 혹은 '한민족'을 일컫는 말로 쓰기 때문에 '조선전쟁'이라는 용어를 쓴다.
1952년 공보처에서 발간한 정부간행물 "6.25사변 피살자 명부"와 1952년 국방부에서 간행된 정부간행물 "한국전란지"로 표현되기도 했다. 행정관서에서는 주로 '6.25'로 표기했다. 1973년 한국 정부에서 제정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도 6·25 사변일(六二五事變日)이 등장하고, 2014. 3.24일에는 6·25 전쟁일로 개정되었다. 반면 한국 정부에서 만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한국전쟁이 등재되어 있다. 그리고 민간에서는 전쟁이 발발한 날짜를 근거로 6.25라고도 많이 불러오고 있으며, 6.25 사변 또는 6.25 동란이라도 부르기도 한다. 또는 경인년(庚寅年)에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발발한 난(亂)이라고 하여, 경인공란(庚寅共亂)이라고도 불린다.
6.25 전쟁이란 말은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단어로 한국적인 자주성, 주체성을 강조하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한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Korean War라는 명칭은 객관성 중립성을 보여준다고는 하나, 그 번역어인 '한국전쟁'은 엄밀하게 중립적이지는 않다. 전쟁의 한 쪽 주체인 북한에서 스스로를 '한국'이 아니라 '조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조선'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아무튼 한국학계에서는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서 대체로 6.25 전쟁 또는 한국전쟁으로 쓰인다. 2011년 한국전쟁학회에서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할 경우 전쟁 발발 책임이 모호해지거나 전도될 우려가 있다면서 6·25전쟁이라 부르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학회명에 불만이 있나 김 교수는 6·25가 당시 미소 냉전체제 하에서 국제전의 성격을 띤 점을 감안하면 이 전쟁의 영문 표기는 '1950~53 한국 6·25 전쟁(the 6·25 War in Korea 1950-53)' 혹은 '1950~53 한국 공산주의자 전쟁(the Communist War in Korea 1950-53)'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The Korean War를 한국전쟁으로 번역하는 것은 '조선'과 '한국'이 가지는 역사적, 개념적 차이를 간과한 것으로 기계적인 번역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조선일보 전병근 기자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1980년대 미국의 수정주의 학자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1, 1981년 출간·국내에는 1986년 번역·출간)이 국내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국내 좌파들에게 확산됐다는 기사를 썼다. 기사
국방부에서 발간한 군 공식간행물을 보면 1952년부터 2004년까지 발간된 서적은 제목이 '한국 전쟁'으로 되어 있었지만, 2004년부터 '6·25전쟁'이 사용되기 시작해 2005년부터는 6·25전쟁 한가지만 사용하고 있다.[27] 국방부 지정 공식용어가 과거에는 한국 전쟁이었으나 2004년부터 6·25전쟁으로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 중앙 도서관에 소장 중인 단행 자료를 검색하면 1980년 이전에 발간된 자료 중 제목이 한국전쟁으로 되어 있는 자료는 제목이 6·25로 되어 있는 자료보다 2배가 더 많이 검색되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출판계나 학계에서도 '한국 전쟁'이란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28]
한국의 역사에서 벌어진 전쟁이 비단 6.25 전쟁만이 아닌데 한국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혼동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6.25가 그 사건의 성격을 포괄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다른 사건들의 명칭도 바꾸어야 하냐는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5.18 민주화운동이나 6.10 만세 운동 등도 모두 사건이 발발한 날짜를 근거로 명명하고 있다. 그리고 유럽에서도 2월 혁명이나 7월 혁명처럼 그 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기점으로 사건의 명칭을 부여한 예도 존재한다. 따라서 6.25 전쟁이라고 쓰는 것이 문제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역사 용어를 쓰느냐 하는 것도 그 사건을 바라보는 이에 따라서 다양할 수 있다. 그것 역시도 하나의 해석의 산물이자, 사관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군사적인 충돌의 의미를 가진 Conflict라는 단어를 사용해 6.25 전쟁을 지칭했다. 6.25 전쟁이 대규모 국제 전쟁으로 비치면 안된다고 봤던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 의원들에 의해 War라는 단어의 사용이 사실상 금기시 되었다. 6.25 전쟁이 World War III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공산권 국가와 서방의 대중들에게 6.25전쟁이 '전쟁이지만 전쟁 같이 느껴지지 않도록' 이를 축소하여 지칭한 것이었다(당시엔 Korean Conflict라 불렸다). 후에 6.25 전쟁이 정치인들의 손에서 역사가들의 손으로 넘겨질 때 쯤, War라는 단어가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남한과 북한이 싸웠다고 해서 남북전쟁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용어는 미국의 내전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혀져 있기에 혼동의 여지가 있어 공식적인 자리에선 잘 쓰이지 않고 있다.
[3] 상세
과거에는 수정주의적 관점이 대세였으나, 소련의 기밀문서가 해제된 지금은 김일성의 남침야욕이 전쟁의 주 원인이라는 데에 큰 이견이 없다.[29] 소련에서는 지원에 소극적이었지만 중국군으로 위장한 파일럿들을 일부 보낸 바 있다. 이 파일럿들의 통신이 감청되기도 했지만 소련이 개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경우 확전을 우려한 미군과 UN군에서는 이를 일부러 무시했다. 6.25 전쟁이 무조건 한반도 내의 국지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 입장에서는 자꾸 전쟁을 키우려고 하는 맥아더가 굉장히 위험한 인물로 비춰졌다.[30] 결국 트루먼에 의해 해임된 맥아더는 일단 전쟁 영웅으로 미국에 귀국하지만 이후 미 의회 상원위원회 청문 과정에서 그 진실이 까발려져 명예를 실추당한다. 6.25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면 안 된다고 봤던 사람은 트루먼 뿐만이 아니었고 공개된 스탈린의 서필을 통해 스탈린 역시 6.25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까봐 크나큰 내적 괴로움을 겪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31][32] 양쪽 모두 확전의 두려움에 자기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전쟁 억제력을 확보해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았다.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제1~5공화국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권에서 국시로 삼았던 반공, 북한은 남조선 적화통일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국가 운영과 국민여론 및 의식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 이 전쟁으로 생긴 각 체제(體制, Regime)는 유지되고 있다.
[4] 대한민국
반공이 국시였던 지난 세기에는 "북한의 사악함과 국군의 영웅적 희생"을 강조하기 위해 사실상 은폐되었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국군도 전쟁 범죄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표적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있는데, 대한민국 국군 및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단체에 의해 10만~30만 명의 38선 이남 거주 대한민국 국민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그나마 북한, 중공과 달리 유엔군은 이런 행위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살을 저지르는 국군 및 경찰을 유엔군이 저지하여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존재하는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영국군이 홍제리 학살 사건 당시 추가적인 학살을 막은 사례 등)
그 외에도 한강 인도교 폭파, 소년병 징집(자발적으로 종군한 학도병과는 별개), 국민방위군 사건, 한국군 위안부 등이 있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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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학자 존 톨랜드가 딘 장군의 유족을 찾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딘 장군이 전쟁 중에 얻어먹었던 음식 중 하나가 마늘 장아찌였는데, 딘 장군은 마늘 장아찌의 맛에 매우 감탄하여 일부러 하산해서 더 얻어오기까지 했다. 전후 샌프란시스코 육군장교회관에서 백선엽(1920~ )과 점심을 먹으면서 그가 하는 말이 "백 장군, 요즘 내가 말이지요, 김치를 잘 담근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김치 맛에 푹 빠졌나 봅니다." 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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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전선 각지의 부대에 알리는 전보를 쳤던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송해였다고 추정된다. 고향이 이북인 송해는 6.25 전쟁 당시 전보병으로 근무했는데, KBS2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하여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당시에 쳤던 모스 부호를 기억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앞서 소개된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소휴전회담 중 1번 항목의 상호 안전보장 조약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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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은 6.25 전쟁 중 인민재판에 대한 정보를 전파받자마자 "김일성 동무는 이 미친 짓을 규제하지 않고 무얼 하는 건가?"라며 격분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군이라는 집단은 인민의 협조를 얻는 것을 미덕[37]으로 삼는 집단인데 그 인민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짓을 하는 건 정신나간 행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탈린에게는 충격적이겠지만 인민재판을 도입한 것은 다름아닌 김일성 본인으로, 스탈린은 자제하길 바랬던 그 짓을 김일성은 되려 자기가 앞장서서 부하들에게 명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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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에서 양측이 한반도에서 사용한 탄약량은 2차대전기 유럽 전선 전체에 쏟아부은 것에 비견될 정도로 많다. 전선이 교착된 후에는 하루에 수십 만 발을 쓰기도 해서 '밴플리트 탄약량'이라는 소비량 단위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6.25직전의 국지전 때 국군 포병대가 사용한 탄약량을 보고 '좀 아껴 효율적으로 쓰라'며 탄약보급량을 줄이고 탄약고를 걸어잠근 것이 미국 고문단이었다는 것. 근데 이건 고문단의 잘못이 아니라 초기 한국군이 대책없이 탄약을 낭비한게 문제였다고 보는게 맞다. 미군이 1949년 6월에 5100만발의 각종 탄약을 제공했는데 6개월동안 3000만발 이상을 소모했다. 그 와중에 옹진반도에서는 6일동안 105mm 곡사포탄 5,572발, 각종 박격포탄 19,000여발을 포함하여 100만발 이상을 소모했고 전과는 북한군 69명 사살. 거의 북한군 한명 죽이는데 14,700여발을 쓴거다. 포탄만 따져도 1명당 350발을 넘기는 판이라 고문단장인 로버츠 준장이 한국군이 탄약을 너무 낭비하니 달라는대로 주면 답이 안나온다는 소리를 할 지경이었다. 참고로 당시 1개 포병대대가 동원되었으니 15문의 야포가 투입된 셈이니 1문당 하루에 62발을 갈겨댄 셈인데 미군 포병의 탄약 제한이 105mm 야포는 하루에 50발로 제한되어 있었고 저 양이 크게 부족한것도 아니었으니 얼마나 갈겨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렇게 탄약을 소모해서 전과라도 있었으면 모를까[38] 그렇게 갈겨서 올린 전과가 최대로 잡아도(즉 모든 적 병력이 105mm탄에 죽었다고 가정할 경우) 69명 사살하는데 그쳤으니 제한을 걸어도 할 말이 없다.
지금까지 전쟁인 ' 6.25 전쟁 ' 에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저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