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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 운동 ] - 5.18 민주화운동

지식백과사전님 2020. 5. 19. 02:30

안녕하세요. 지식백과사전입니다. 오늘은 민주화 운동인 ' 5.18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개요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에 노여움으로 말하네


- 정태춘, '5·18'

"5ㆍ18민주화운동"이란 1980년 5월 광주 일원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하여 군부 등에 의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다수의 희생자와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을 말한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2조 제1호

 

 

 

[2] 설명

5·18 민주화운동, 또는 광주 민주화운동은 넓게 보면 1979년 12·12 군사반란 직후부터, 좁게 보면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세력이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학살 범죄가 일어나기도 했던,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미디어에 따라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항쟁, 광주학살, 광주사태 등으로 부르며, 보통 일어난 날짜를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 초•중•고 교과서에서는 대부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적고 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하였고,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반란군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일으킨다.

12·12 군사반란이 만든 계엄령대학교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려 이에 대한 대처는 뒤늦게 나타났으며,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졌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20]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전두환의 군사 독재에 맞서 일어난 시위가 진압군과 격한 대립을 벌인 끝에 광주에 진입하려는 진압군과 광주 시민들의 총격전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내 진압되었고, 수많은 사상자[21]가 발생하였으며,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많이 알려진다. 이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당시 상황과 이후 여파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희생으로 의의가 다시 떠올랐다.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군부의 행동을 묵인, 사실상 전두환 군사정권의 편에 섰다고 여겨진 미국에 실망한 운동권과 지식층 중 일부가 반미주의로 돌아서는 계기를 마련했고, NLPDR민중민주주의의 성장에도 알게 모르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22]

 

 

 

 

[3] 광주 민주화 운동의 책임소지

5·18 민주화운동, 또는 광주 민주화운동은 넓게 보면 1979년 12·12 군사반란 직후부터, 좁게 보면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세력이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학살 범죄가 일어나기도 했던,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미디어에 따라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항쟁, 광주학살, 광주사태 등으로 부르며, 보통 일어난 날짜를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 초•중•고 교과서에서는 대부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적고 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하였고,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반란군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일으킨다.

12·12 군사반란이 만든 계엄령대학교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려 이에 대한 대처는 뒤늦게 나타났으며,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졌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20]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전두환의 군사 독재에 맞서 일어난 시위가 진압군과 격한 대립을 벌인 끝에 광주에 진입하려는 진압군과 광주 시민들의 총격전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내 진압되었고, 수많은 사상자[21]가 발생하였으며,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많이 알려진다. 이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당시 상황과 이후 여파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희생으로 의의가 다시 떠올랐다.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군부의 행동을 묵인, 사실상 전두환 군사정권의 편에 섰다고 여겨진 미국에 실망한 운동권과 지식층 중 일부가 반미주의로 돌아서는 계기를 마련했고, NLPDR민중민주주의의 성장에도 알게 모르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22]

 

 

 

[4] 명칭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공식 명칭은 법률로 규정되어 있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인데, 이것은 내란 세력(소위 신군부)에 저항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며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의미하며, 민주정의당이 처음 사용한 명칭이다. 1988년 6월 21일에 5·18의 명칭으로 논란이 있을 때 민정당은 '광주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을 주장했다. 이 명칭은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에게 격렬한 반대를 받았고 오후 늦게까지 절충을 계속 겪을 정도였다. 동아일보 1988년 6월 21일 기사 사흘 뒤에 통일민주당은 결국 민정당의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평화민주당은 여전히 반대했다. 1988년 6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급기야 평민당에선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쓰는 행위를 "배신 행위"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 단어가 얼마나 불쾌하게 받아들여졌는지 느낄 수 있다. 1988년 6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평민당은 27일이 되어서 겨우 이 명칭을 받아들였다. 1988년 6월 27일 동아일보 기사

5·18 단체에선 상당히 긴 시간 동안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단어를 썼다. 일부에선 이걸 진보 용어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사실 '광주민중항쟁'이란 단어는 보수주의자유주의 세력한테도 받아들여졌던 단어였는데,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동아일보 같은 보수주의 언론이 그대로 썼을 정도였다. #, #, #

민주화 운동이란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노무현 정부부터였다. 이것 때문인지 노무현 정부 이후부터는 민중항쟁이 진보 명칭인 것처럼 오해 받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진보나 좌파에서만 통용됐던 편향 단어는 민주화 운동도 아니고, 민중항쟁이란 단어도 아닌 광주혁명, 광주민중혁명이란 명칭인데, 너무 극단적이고 편향된 명칭이라 학계에서 무시당했다. 김영택 박사나 최정운 박사에 따르면 5·18은 민중혁명 같은 게 아니며 오히려 시민군이 그런 걸 거부했다고 한다. 학술 쪽으로 깊이 파고 싶다면 김영택,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5월 광주의 삶과 진실을 참고하자.

5.18의 민주화 운동적인 성격을 폄훼 또는 완전히 부정하는 인사들이 '광주 폭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나,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면[27]이 너무 많고, 국민 저항적인 성격을 무시한 명칭이다. 꽤 우익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 조차도 쓰지 않는다.[28][29] 자세한 것은 5.18 민주화운동/왜곡 문서로.

북한에서는 '광주 인민봉기'라 부르며 '남조선 군사파쇼에 대항한 봉기'라 선전하며 매년 기념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유네스코에 등록된 대로 'Gwangju Uprising(광주 봉기)'라 부르거나 'Gwangju Massacre(광주 대학살)'라고 칭한다. 드물게 'Gwangju revolt' 혹은 'Gwangju rebellion[30]'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정말로 보기 힘들다. Uprising이 반란 및 폭동 등의 의미를 담고 있어 국내에서 한때 이 명칭에 대해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정작 해외에서는 uprising이 한국 내에서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을 나타낼 때 항상 쓰는 단어임이 알려진 후엔 그런 움직임도 사그라들었다. 이 문맥에서 uprising을 한국의 정서에 맞게 번역하자면, 봉기 또는 의거 정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5] 광주 사태

흔히 인터넷 상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을 가리켜 민주화운동이라고 칭하면 최소한 중립이거나 진보적인 시각, 반대로 광주 사태로 칭한다면 왜곡이라는 인식, 또는 광주 사태라는 단어 자체가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의 언론 탄압으로 인한 왜곡된 용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현재로서는 그런 인식이 옳을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이는 다소 어긋난 인식이다.

87년 6월 이후 민주화된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재평가 되기 전까지, 광주 민주화운동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단어는 광주 사태였으며, 이는 신군부나 신군부의 어용언론 뿐만 아니라 민주 인사 측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단어였다.

관련 자료중 광주 사태라는 단어가 간접적으로나마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80년 5월 20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기자회견문[31]이다. 김영삼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파국적 사태" 또는 "유혈 사태" 등으로 처음으로 언급했으며, 이는 광주 사태라는 단어가 군부의 왜곡으로 만들어진 단어라는 근거로 제시되는 1980년 5월 21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담화문[32]보다 하루 이른 날짜다.

간접적으로 사태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광주사태라고 사건을 지칭하는 최초의 자료는 의외로 신군부측의 문서가 아니라 투사회보 제 6호[33]다. 투사회보는 신군부의 언론왜곡에 저항하는 저항언론이었으므로 신군부의 영향력 하에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광주사태라는 단어 자체가 신군부에 의해 왜곡된 단어였다는 추론은 마땅한 근거가 없다. 그 밖에도 최규하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34]을 발표한 "광주사태수습위원회"는 민주화 운동측 인물들로 이루어졌으며 윤공희 대주교 역시도 광주사태를 여러차례 사용하여 김대중, 정동년민주화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형을 언도받은 이들이나 내란죄로 구속된 민주화운동 참가자 구명운동을 펼친 바 있다.

물론, 이미 1990년대를 거쳐서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진 5.18 민주화운동을, 학술적 의도 혹은 당시의 단어 사용을 존중하려는 의도가 아닌데도[35] 굳이 현 시점에서 "광주사태"라는 명칭을 꺼내어 사용하는 것에는 폄하의 의도가 있다고 볼 여지가 다분하다. 최근에는 지만원, 윤서인 등의 극우인사가 특히나 광주 사태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광주 폭동이나 광주 내란 등의 단어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6] 항쟁 주체의 성향과 이념

근본적으로 5·18 광주 항쟁의 성향은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배 이데올로기에 충실했는데 그것은 반공주의에 근거한 우익 자유민주주의 사상이었다.[36]

이제 총을 든 시민들은 맨손으로 시위를 하고 항의하는 보통 사람인 '민중'이 아니라 '무장한 시민' 이른바 '시민군'이라는 새로운 양태의 '무장세력'으로 전환했다. 이는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시민 무장투쟁을 의미하는 것이고(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무장봉기란 해방 후부터 6.25 전쟁 후까지 있었던 좌익빨치산의 무장투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우익의 대한민국 체제 아래서 발생한 최초의 무장투쟁이라는 뜻. 다시 말하면 같은 우익체제에 대항하는 최초의 우익무장세력이라는 의미다.)


김영택,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 2010, 역사공간, 379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개된 광주항쟁의 이데올로기가 한국전쟁 이후 지배이데올로기로 확립된 자유민주주의였으며, 그것도 반공주의를 전제하는 자유민주주의였다는 점__은 여러 자료에서도 드러난다.」


김정한,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 소명출판, 2013 , 81쪽


항쟁의 참여자들의 주요 이데올로기였던 자유민주주의오랜 냉전체제의 산물인 반공주의를 전제하고 있었다.


김정한, 2013, 83


도청에 간첩 여부를 조사하는 조사과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운동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반공주의를 견지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강력한 반공이데올로기로 인해 자신들의 운동이 용공으로 몰릴 것을 우려한 전략적 대응이었다고 해석하기에는 반공주의에 따른 실제 실천 행위들이 너무 적극적이었고 일상적이었다.


김정한, 2013, 86

이에 관해 대표적인 사례는 가두방송을 담당했던 전춘심(전옥주, 당시 31)의 경험일 것이다. 5월 22일 그녀는 간첩으로 몰렸다가 풀려기도 한다. (...) 그리고 결국 5월 26일에는 시민을 가장한 수사관들이 전춘심을 향해 "저 여자는 교육을 받고 온 간첩이다"라고 소리치자 몰려든 시민들에게 붙잡혀 보안대로 끌려간다. 수사관들이 이런 방식으로 주요 활동가들을 체포하거나 대중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시민들의 반공주의가 진지하고 강력했음을 반증한다.


김정한, 2013, 86~87


5월 21일에도 기자를 자칭하며 촬영하는 민간인에게 누군가 "저 자식 간첩이다"라고 소리치자 시위대열의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즉석에서 공수부대에 인계한 사례가 있었다. (...) 이와 관련해 최영태는 "간첩이라고 하면 모두가 경계를 하고, 심지어는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와 공수 사이에도 잠시 휴전을 하고 간첩 협의자를 인수인계할 만큼 시위대들의 반공의식은 강했다"고 평가한다.


김정한, 2013, 87

22일 오후 3시쯤, 20일 밤의 주인공이었던 전옥주와 차명숙이 용달차를 타고 도청광장에 나타났다. 이들은 19일 밤 이후 꼬박 3일 밤 새우며 방송을 하고 다니느라 목소리가 쉰 듯 했고 매우 지쳐 보였다. 두 사람이 용달차를 타고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는 도청광장으로 오자마자 학생들이 두 사람을 붙잡았다. 둘의 방송연설이 수준급이어서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듯한 데다 내용도 사실과 다른 과장된 내용이 많아 오히려 시민들이 당황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20일 밤의 시위가 그토록 확산된 것으로 두 사람의 선동적 방송연설에 그 연유가 있는 것으로 판단한 항쟁주체 측은 그녀들이 혹시 북에서 보낸 공작요원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둘은 도청광장에서 붙잡혀 일단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후 6시쯤 지프차에 실려 군 수사기관에 넘겨졌다. 이같은 전옥주 차명숙의 검거를 놓고 일부는 정보요원이 두 사람을 검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학생이나 시민으로 위장해 들어왔다는 주장과 순수한 학생들이 군 수사기관에 의뢰해 진짜 간첩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신상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어 넘겼다는 2가지 설이 제기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후자일 것으로 보고 있었다. 둘은 지프차에 태우고 화정동,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경계선에서 군 수사기관에 넘겨줬던 사람은 광주시 주택과 공무원 이무길이었다.(1999년 2월 2일, 이무길 인터뷰. 이무길은 5.18 당시 광주시청 주택과 무허가 건물단속반원이었으며 저자가 인터뷰 할 당시는 광주시민회관 관장이었다. 그는 그 후 타계했다.) (...) 물론 그녀는 북의 공작원이 아님이 수사당국에 의해 밝혀졌다.」


김영택, 2010, 426~428

광주항쟁은 신군부가 몰아붙인 것 처럼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애국세력과 정상적 대한민국체제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정권야욕을 달성하려는 정치군인들과의 갈등이라는 데서 해방 후 일어났던 일련의 좌익봉기와 엄연히 구별된다.


김영택, 2010, 693


5.18 광주민주항쟁을 순수하다거나 무이념, 혹은 정치적 성향이 없는 것처럼 표현되기도 하는데, 그럴 수 있는 건 그 성향이 대한민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5.18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기본으로 아는 거지만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점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37]

5.18은 사회적 맥락에서 국가에 반대하려고 일어난 게 아니라, 전두환이 내란으로 집권하는 과정에서 전두환 내란세력을 상대로 맞서 싸운 항쟁이었다. 논리적으로 보면 항쟁의 성향이 당시 대한민국 지배사상과 다를 이유가 없고 실제로 5.18 항쟁은 그랬다.

실제로 5.18 사진을 검색하면 수많은 태극기가 나오며, 증언을 조사해 보면 수많은 애국가가 나온다.[38]

5.18 항쟁 당시 항쟁 주체들의 "애국"[39]심과 "우익"성은 복잡하게 조사할 필요도 없이 김영택 박사의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읽기도 어렵지 않으니 5.18 공부 입문으로도 적합하다. 강경보수 언론인 조갑제도 "김일성은 오판 말라", "북괴는 오판 말라"는 시민들의 구호를 근거로 광주 민주화운동은 반공 민주화운동이라고 증언했다.2005년 증언 2007년 증언 2013년 증언

 

 

 

 

[7] 사건의 영향

5.18 광주민주항쟁은 한미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것 때문에 로널드 레이건전두환에게 거부감을 보이거나 한미 관계에 영향을 끼쳤을 정도였고, 이런 미국의 태도는 김대중의 석방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정상회담 교섭의 실무를 맡았던 손장래 전 주미공사는 4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해 당시 비공개 접촉을 회고하며 "미국 측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어떻게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손에서 피가 흐르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느냐'며 정상회담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정상회담 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그는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대통령의 구명 문제를 에둘러 언급했고 당시 앨런 보좌관이 이를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귀띔해 비공개 접촉 1달 만에 정상회담이 성사됐다고 설명했다. 이 정상회담을 계기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감형을 받고 1982년 석방됐다.


"김대중 살려주면 전두환 美 국빈방문 허용 '韓·美 정상회담' 거래 있었다"


이후로도 로널드 레이건에게 전두환의 이미지는 좋아지지 않은 듯, 알츠하이머로 인해 전두환을 기억해내지 못하자 참모들이 간신히 설명해주는 데 이때 한 말이 아, '학생들은 죄다 공산당(빨갱이)'이라고 했던 그 친구!"였다. 매카시즘으로도 비판받았던 레이건 대통령에게조차 얼토당토 않는 소리하는 인간으로 기억됐던 것.

또한 당시 국민들의 인식에도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실제로 5.18 민주화운동은 5.16 군사정변과 달리 전두환의 정통성에 심각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심지어는 5.16 군사정변 당사자조차 내란 세력이 저지른 짓이라고 인식할 정도였다.

김종필, 김재춘, 김계원, 장세동 씨 등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전두환 씨는 불참.
국회가 화제가 되고 얘기는 80년 광주 문제로 옮아갔다.
장세동(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장 경호실장) 씨가 광주 사태는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이라는 취지로 80년 5월의 광주 상황을 설명해갔다. 그러자 김재춘 씨(3代 정보부장)가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성격 그대로 '무슨 그따위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당신네들이 총칼 들고 정권 잡아가지고 저지른 짓을 무슨 홍경래 반란이라고?' 하며 내쏘았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분은 웃으며 일어서면서 '국회에서 특위 조사할 것도 없이 결론이 이미 나와 버렸군' 하여 웃고 헤어졌다. (당시의 한 참석인사)


동아일보 1992년 10월 10일자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글) 112회 - <전두환 '대권 각본' 밀어붙이다>


5.16 군사정변에 가담할 정도로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3대 정보부장도 저랬으니, 일반 국민들 사이에 퍼진 인식은 어땠을지 짐작이 가능하다.[40]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인,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긴글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