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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운동가 ] - 전태일

돌아온 지식백과사전 2022. 1. 8. 09:31

안녕하세요. 지식백과사전입니다. 오늘은 노동운동가 ' 전태일 ' 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개요
대한민국의 노동자, 노동운동가였다. 1960년대 평화시장의 봉제 공장의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 권리를 위해 노력하다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고자 박정희 정부와 자본기업들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22세의 나이로 근로기준법 법전과 함께 분신자살하였다.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 등장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노동 운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며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이후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한국사회에서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지식인 계층, 대학생들, 당사자 집단인 노동자 계층 전체 등이 그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하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어머니 이소선 열사 또한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노동운동가가 되어 노동운동의 대모로 불리게 되었다



[2] 생애
1948년 9월 28일 대구 남산동에서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 사이에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고운 심성과 다정다감한 성격, 불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기질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재단사였던 그의 집안은 어렸을 때부터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 부산으로 이사갔다가 서울로 이사온 후 아버지가 봉제 공장을 차려 어느 정도 먹고 살 수준의 생활을 영위한 적도 있지만 4.19 혁명 직후 거액의 사기를 당하는 통에 온 가족이 다시 가난의 구렁텅이로 빠졌다. 밥을 못 먹는 일은 약과에 불과했으며 이는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시절까지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다니던 초등학교 마저 중퇴하고 17세 무렵 무일푼의 몸으로 상경해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점에 이른바 '시다'라고 불리는 재단 보조로 취직하게 된다. 이후 빠른 일처리와 뛰어난 실력으로 직장에서 큰 인정을 받고 빠른 시간 내에 시다에사 제단사로 승진하며 다른 재단사 친구들과 힘을 모아 자기만의 가계를 가지자는 꿈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시다 한명이 심하게 기침을 하는 걸 보고 병원에 가라고 도움을 청하러 하나 그 병을 알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여공의 모습과 얼마 뒤 병에 걸린 여공이 해고된 걸 보면서 재단 보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 박봉, 질병(폐렴 등)으로 시달리는 현실에 충격을 먹고 그러한 노동 현실의 타파와 개선을 위한 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9]



[3] 영향
전태일은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의 죽음에 한국 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 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동안 미처 주목받지 못했던 장시간의 열악한 근무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현실이 한국 사회에서 조명받게 되었고, 정치적 의미에서의 민주화만을 염두에 두던 대학생과 지식인들은 이때부터 노동자와 도시 빈민 등의 삶의 문제들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들 중 일부는 야학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교육시키고 권리 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거나 공단에 직접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1970~1980년대의 한국은 대학생이 지금보다 훨씬 수도 적고 엘리트로의 길이 보장된 고급 두뇌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들이 공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큰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다.[18] 한편으로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이용해 정부나 제도권 언론에서는 이들을 '노동자들의 불만을 조장하는 불온한 위장 취업자[19]'로 호도하기도 하였다.[20]

또한 노동자들 스스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자주적으로 노동조합을 세우려는 노력을 하였고 이에 따라 1970년대 중에 청계피복노조 이외에도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타, 반도상사, 원풍모방, YH무역 등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세워져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운동한다. 이렇게 1970년대에 세워진 민주 노조는 대부분 공단 지역의 영세 노동 집약적 사업장 위주로 세워졌으며 남성에 비해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던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다. 이러한 흐름은 1987년 6월 항쟁의 영향으로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현대그룹, 대우그룹 등 대기업 남성 노동자 중심의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대거 세워지기 전까지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하였다.




[4] 어록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분신 당시 외친 말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태일 일기 中...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깎아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려야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5] 여담
매년 전태일 열사의 기일인 11월 13일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주관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다. 11월 13일이 주말이 아닌 평일이면 11월 13일 직전의 주말에 열린다.[37] 한국 최대 노동조합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자신들의 총대회를 전태일 열사 기일에 여는 것은 그만큼 그가 한국 노동 운동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매년 노동 현안에 대한 의제가 기조로 설정되며 전야제는 주로 문화제 형식, 본대회는 집회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열사에 대한 추모도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다.

전태일 열사의 추모곡으로는 그 날이 오면이 있으며 민중가요 불나비도 그의 추모곡이다. 그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대의 드라마 OST에 가사만 바꿔서 「전태일 추모가」가 불러졌는데 의외로 싱크로율이 좋다.

▷가사
지금도 가슴 속에 파고드는 소리
전태일 동지의 외치던 소리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헛되이 말라
외치던 그 거리에 젊은 피가 흐른다
내 곁에 있어야 할 그 사람 어디에
다시는 없어야 할 쓰라린 비극

사실 직접적으로는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미디어펜, 미래한국 등 극우 인터넷 언론 매체들 중에서는 은연 중에 전태일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들도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이 기사의 경우 초등학생에게 전태일, 마오쩌둥, 카를 마르크스 등 좌파에 대한 책을 읽도록 한다며 비판한 내용이다.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을 좌파의 활동기라며 까고 문화와 예술은 항상 불온하고 전복적이며 체제 타격적이라는 주장까지 늘어놓는다.#

2013년 1월에 올라온 이마트에서 직원 및 퇴직자들에 대한 내부 사찰을 했다는 폭로 기사에 의하면 내부 문건에서 불온 도서로 지목된 서적에 '전태일 평전'이 있었고 책을 갖고 있던 계약직은 해고되었으며 다른 이마트 지점에서도 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노동운동가 ' 전태일 ' 에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긴글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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