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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사고 ] - 이태원 살인사건 본문
안녕하세요. 지식백과사전입니다. 오늘은 사건사고 ' 이태원 살인사건 ' 에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개요
1997년 4월 3일 밤 10시경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소재 버거킹 남자화장실에서 한국인 조중필(당시 22세[1]1974년 4월 27일 생)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습격당해 흉기로 9번이나 찔려 살해된 사건
[2] 상세
1997년 4월 3일 밤 10시, 홍익대학교 공과대학 재학생 조중필 씨는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여자친구와 함께 근처 햄버거 가게인 버거킹[2]에 갔다. 여자친구가 주문하는 사이에 조 씨는 화장실에 들어갔고, 곧이어 2명의 한국계 미국인들[3]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조 씨는 화장실 바닥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채 발견되었으며, 신고를 받고 경찰과 119 구급대원들이 도착했지만 이미 9군데를 흉기로 찔린 조 씨는 왼쪽 목 동맥이 절단되어 그 자리에서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3] 조사과정
미국 국적자 17세의 아서 존 패터슨(Arthur John Patterson 1979년생)과 18세의 에드워드 건 리(Edward Kun Lee 1979년생)[4]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사건 다음 날 미합중국 육군범죄수사사령부(CID, Criminal Investigation Command)는 익명의 제보를 받는데, 범인이 아서 패터슨이라는 내용이었다. 제보에 따르면 패터슨은 평소에도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자주 보였고 늘 흉기를 소지하고 다니며 친구들에게 이를 자랑하고 다녔다고 하였다. 패터슨은 유럽계 미국인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평소 품행이 불량해 부모와 싸움이 잦았으며, 지인들 사이에서는 패터슨이 자신의 고향 지역 연고의 갱단과 연줄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16세 때 이미 캘리포니아 소년원에서 16개월 동안 구금된 전력도 있었다. 따라서 미합중국 육군범죄수사사령부는 패터슨을 용의자로 수사방향을 잡았으나, 아들과 잘 어울리던 패터슨의 범행 소식을 접하고, 추궁한 아버지로 인해 에드워드 리가 자신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자백하면서 용의자는 2명이 되었다.
그 둘은 서로에게 범죄사실을 미루었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한 김락권 형사 1팀장과 미군범죄수사대는 아서 패터슨이 온몸이 피투성이라는 점, 손에 미국 갱단의 마크가 있고 살해 방법이 그 갱단의 수법과 비슷하다는 점[5] 등을 들어 패터슨을 용의자로 지목하였으나, 수사를 담당한 박재오 검사는 법의학적인 판단(부검결과)과 그들의 친구인 C의 증언을 근거로 에드워드 리를 용의자로 지목했고, 그를 살인죄로 기소하면서 사건이 꼬이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당시 검찰(담당 박재오 검사)이 에드워드를 살인범으로 기소하면서 3가지 근거를 제시하였는데, 첫 번째는 키와 체격이었다. 당시 부검의는 상처의 흔적을 봤을때 176cm의 피해자 조중필보다 가해자의 키가 커야 한다는 추정을 하였다. 그리고 아서 패터슨은 피해자인 조중필씨보다 키가 작고[6] 왜소했으나, 에드워드 리는 180cm, 105kg로 피해자보다 훨씬 키도 크고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러나 이 추정에 대해서 표창원 전 경찰대학 교수는 피해자가 다른 공격을 받고 몸을 숙이거나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피해자보다 키가 작은 범인이 피해자를 찔렀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법의학적 소견과는 달리 심리학적으로는 신체적으로 왜소한 범인이 반격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이렇게 과도한 수법으로[7] 범행을 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두 번째는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였다. 에드워드 리는 거짓으로, 패터슨은 진실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사에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선 1998년 당시 거짓말탐지기 자체가 신뢰도가 낮아서 30%가 넘는 오차를 보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조사방법도 엉터리였다는 것이다. 한국말이 서투른 에드워드 리가 조사과정에 통역을 요구했으나, 묵살되고 포승줄에 묶인 상태에서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받았고, 반면에 패터슨은 한국어가 더 유창했는데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리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어 통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답변할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있었고, 편안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가해자가 범행당시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을 수 있는 해리성 장애를 이유로 에드워드 리를 범인으로 지목했다.[8] 패터슨은 가해자가 칼을 잡은 방법과 찌른 부위와 횟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여 증언했고 이는 피해자의 몸에 남은 자창과도 일치했지만, 상대적으로 에드워드 리는 사건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일반적으로 피해자나 목격자의 기억은 경우에 따라 부정확할 수 있으나, 가해자의 기억이 부정확하다는 연구는 어떠한 (범죄심리학)교과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검사가 이런 얘기를 어디서 주워듣고 이렇게 사건을 뒤집히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상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다행히, 이런 증명된 적 없는 검사의 황당한 주장들은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패터슨 증언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며 재판 결과를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4] 검찰의 실책
서울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서는 검사의 기소와 근거자료를 인정해 에드워드 리에게 살인죄로 각각 무기징역(1심)과 징역 20년(2심)을 선고하였다. #
하지만 대법원에서는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하였고, 결국 서울고법에서는 새로운 증거를 찾지 못하여 에드워드 리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살인범일 수도 있지만 증거가 부족하여 유죄를 확정할 수 없다는 이유. 이후 재상고심에서도 대법원은 그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한편 아서 패터슨은 단순흉기 소지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반년 만인 1998년 8월 15일 815 특별사면으로 풀려난다.
에드워드 리가 무죄 판결을 받음에 따라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그를 재기소 할 수 없었던 유족들은 살인죄가 아닌 흉기소지죄로 기소되어 형을 받았던 패터슨을 고소하여 검찰이 패터슨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였으나, 검찰이 패터슨에 대한 출국금지 연장을 미룬 사이에[9] 그가 미국으로 도주하는 바람에 사건은 미제로 남게 되었다. 방송에서 파악한 결과 당시 출국금지 등 사건을 담당하는 계장이 단란주점 뇌물수수 등으로 얽혀 담당 검사[10]가 경황이 없어서 연장을 하지 못한 어이없는 실수라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밝혀진다.[11]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해 서울고등법원에서 피해자 가족들에게 34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마저 대법원에서 '패터슨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확정판결도 내려지지 않았고 조사를 아예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라는 취지로 유가족에게 패소 판결을 내려 손해배상 청구조차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은 사실상 진범을 밝힐 기회를 잃었다며 부모님은 1500만 원씩, 누나와 할아버지는 100만 원씩 배상을 받았다.
결국 에드워드 리의 무죄가 확정됐고, 패터슨은 살인으로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법적인 의미의 무죄추정원칙과 별도로 패터슨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검찰은 둘 다 살인죄로 기소하지 않고 리에 대해서만 살인 혐의를 적용하였다. 참고로 영화에서는 동료 검사가 정범, 종범으로 공소를 제기하라고 했지만 박대식 검사가 거절. 이렇게 되면 법원에서도 공범 이론을 적용할 수 없다.
[5] 사건 이후
당시 초동수사를 지휘했던 김락권 형사가 2013년 사망 당시까지 아더 존 패터슨이 진범이라고 믿은 것과는 달리, 박재오 검사는 현재까지도 에드워드 리가 진범이라고 믿고 있다. 재판부는 경찰수사와 검찰수사에 대해 각각 다음과 같이 표했다. 당시 김락권 형사가 지휘했던 경찰수사에 대해서는 수집된 증거와 여러 목격자의 진술을 바탕으로 내려진 합리적인 의견이었다. # 그러나 박재오 검사가 담당하여 진행한 검찰수사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원칙조차 없이 수사를 했고, 어떤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패터슨의 진술을 진실로 믿었다.라고 표현해 충격이 일었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박재오 검사가 취조하는 과정에서 술에 취해있었다는 것이다.# 박 검사가 취조나 기소 업무를 처리하면서 술에 취한 상태이고 횡설수설했다는 증언은 조중필 씨의 누나 뿐 아니라 기소당한 피의자 입장이었던 에드워드 리 역시 한 바 있다. 에드워드 리가 음주 상태인 박 검사의 상태를 지적하며 항의하자 욕설을 퍼붓고 서류를 집어던지는 등 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고 한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박재오 검사는 에드워드 리의 무죄 판결에 대한 회의를 느껴 무죄 판결이 난 이후 1년만에 검사를 사직하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2000년에 있었던 박재오의 인터뷰 2017년 박재오의 인터뷰 비회원 댓글 작성이 가능하다
중요한 사실로, 미국으로 도주한 패터슨은 미국에서도 다양한 범죄를 저질러 여러번 기소되어 재판에 오르내렸다. 반면 리는 오히려 한국에 정착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취재 한 결과 패터슨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리아 타운에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여전히 본인은 결백하며 리가 진범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검찰에서 그렇게 찾아 헤매도 못 찾았다고 한 패터슨을 언론에서는 합법 사설탐정에게 수수료를 지불한 뒤 금방 찾아냈다.
처음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리는 현재 한국에서 가정을 가진 가장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2009년 말에 한 인터뷰에 의하면 리는 당시 재판으로 인해 2년 가까이 구금되어 있었고 사건으로 인해 큰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으며 살인죄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의심받고 있다는 데에 억울함을 표시했다. 2015년에도 아버지와 함께 인터뷰에 나왔는데, 살면서 잘못을 많이 했지만 최소한 살인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는 걸 강조했다.
패터슨에 대한 공소시효가 2009년을 기준으로 3년가량 남아 있었다.[12] 만약 미국으로부터 패터슨의 범죄인 인도가 수행된다면 조사하고 재판할 시간은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리는 이미 해당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나 있으므로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거해 다시 재판이 불가능하다.
한편 이 사건이 거론되기 1년 전인 2008년. 12년 전 미국에서 갱단의 일원으로 독거노인 엔서니 슈레더를 강도 살해한 한인 데이비드 남(남대현)이 체포되어 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아서 패터슨을 다시 잡아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말이 있었다.[13]
이 사건 이후 밀폐된 공간에 두 명의 용의자는 서로에게 목격자가 될 수 없다.
지금까지 사건 사고인 ' 이태원 살인사건 ' 에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긴글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