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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 - 김광석 본문
안녕하세요. 지식백과사전입니다. 오늘은 가수 ' 김광석 ' 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개요
한국의 가수, 싱어송라이터, 사회운동가[6] 주 장르는 포크. 대구시 출신으로 남구 (당시) 대봉동 태생으로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 후 서울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짝사랑할 때는 '사랑했지만', 입대할 때는 '이등병의 편지', 이별에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서른 살 때는 '서른 즈음에'로,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할 때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좌절을 극복할 때는 '일어나', 정의를 외칠 때는 '광야에서', 인생의 황혼기에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로 함께했고 한국인들의 인생과 감성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감미롭게 표현한 가수이다.
그야말로 가객, 노래하는 시인, 노래하는 철학자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드문 예술가이며, 대중들에게 가수 김광석이라는 이름 뿐만이 아닌 광석이 형, 오빠, 아저씨로도 남은 가수.
대표곡으로는 <서른 즈음에>, <이등병의 편지>가 많이 꼽힌다.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삽입. 대한민국의 많은 남성들을 울리고 있다. 군대하면 생각나는 노래다. 이 곡이 김광석 개인에게도 의미가 큰데 그는 군에서 사고사한 형으로 인해 이등병으로 전역했다. 아울러 <사랑했지만>,<바람이 불어오는 곳>,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일어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랑이라는 이유로> 등이 있다.
[2] 학창시절부터 데뷔 전까지
중학교 때부터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의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 보는 법을 익히며 1978년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1992년 6월 13일, 충남 예산에서 책마당 운영기금 마련을 위한 초청공연에서 안치환과 함께 나와 노래 부르는 유튜브 영상들이 있는데 안치환이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부를 때 김광석은 바이올린을 주섬주섬 꺼내들고 연주한다.(#)
이렇게 다양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는데 반해 그의 상징과도 같은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다소 늦은 편인데 1982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되고 1학년 때 대학 연합동아리 '연합메아리'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3] 활동 초기부터 노찾사 활동까지
(왼쪽이 안치환, 가운데가 김광석, 오른쪽은 노찾사, 해오라기에서 활동한 배훈)
1984년 그는 김민기의 「개똥이」 음반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때 함께 한 이들과 의기투합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결성한다. 이때 김민기의 학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김광석은 가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김광석은 김민기의 학전에 무턱대고 들어가 가수가 되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김민기는 김광석을 계속 거절했으나 학전의 상황과 김광석의 의지를 보고 김민기의 학전에 들어오게 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1985년 1월 김광석은 군에 입대했으나 큰 형님이 이전에 군에서 사고사했기 때문에 6개월을 복무한 후 7월 제대하게 된다. 제대 후, 김광석은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앞에서 '고리'라는 카페를 열었지만 워낙 후배 가수들과 동료들에게 밥과 술을 공짜로 대접하는 바람에 얼마 영업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고 한다.
1987년 10월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노찾사의 첫 정기 공연에 참여했다. 호소력이 담긴 '녹두꽃'이란 노래로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단숨에 노찾사의 간판 가수로 떠오르며 각종 집회에 단골로 초대되었다.
1987년 여름, 김광석, 김창기 등 평소 노래를 좋아하던 청년 7명이 모여서 자그마한 노래 동아리를 만들었고, 산울림의 김창완이 이들의 노래를 듣고 정식으로 음반을 내자고 권유하여 1988년 7인조 그룹 동물원의 1집이 세상에 나온다.
별 생각없이 낸 음반이었기에 김창완은 이들의 음반을 작업하면서 반농담으로 "이걸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 거다."라는 생각을 했고, 미약한 팬층이라도 확실히 확보하자는 의미에서 '가수 이름을 '이대생을 위한 발라드'라고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들 자신 또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적었다.
'거리에서', '변해가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혜화동' 등 동물원의 노래는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밝은 이미지를 구축, 천편일률적인 사랑 타령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던 주류 대중음악의 작은 대안이 되었다.
하지만 동물원의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가수는 부업 내지는 취미 생활이었고 동물원은 기본적으로 듣기 쉽고 편한 곡을 지향했기 때문에 김광석의 개성이 너무 돌출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김광석은 친구들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완전히 프로로 데뷔하기 위해 동물원을 나온다.
[4] 솔로 활동
1989년 김광석은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솔로 1집을 내놓으며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시작했다. 음악 활동을 하던 중에 1년의 열애 끝에 90년에는 결혼에 성공한다.
1991년에 발표한 2집은 한동준이 제공한 <사랑했지만>과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창기의 <그날들> 등이 사랑을 받으면서 김광석을 더욱 대중적인 위치로 올려놓았다.
1992년 김광석은 <나의 노래>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이 담긴 3집을 발매하면서 민중가수 출신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민중가수로의 입지가 다시 재조명받은 것이 3집 이후이다.
1992년부터는 불교방송에서 송출된 라디오 프로그램인 <밤의 창가에서>의 DJ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2년 5월 4일, 즐거운 사라의 외설 문제로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던 연세대학교 광마 마광수 교수그러지 마요가 방송의 게스트로 출연하여 방송 수위를 넘는 발언을 한것이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김광석은 더욱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진행자 김광석은 동조를 했다는 이유로 마교수와 함께 청소년 프로그램에 한 해 동안 방송 출연 정지 조치를 요구 받았지만 방송법에 이러한 권한은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마광수 교수는 3개월, 김광석은 1개월 동안 불교방송에서만 방송 출연금지를 받았다. 뉴스1 뉴스2
1993년 7월, 김광석은 자신의 노래 생활 10년을 결산하는 취지에서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한 달 간의 장기 공연을 열고 '다시 부르기' 1집을 발표했다. '거리에서'와 '광야에서' 등이 수록된 다시 부르기 1집은 대중 음악계를 강타한 '리메이크' 선풍의 도화선이 되었다.
1994년 <일어나>가 실린 4집의 성공으로 김광석은 한국의 소시민을 대표하는 가수로 확고한 위치를 잡는다.
1995년에는 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 양병집 등 1970년대 포크 1세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한국 포크 음악의 계보를 하나의 앨범으로 정리한 '다시 부르기 2집'을 발표하면서 전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Green Tree Story' 투어 콘서트를 열었다. '다시 부르기 2'는 그가 9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자리매김하게 해준 명반이었다.
워낙 많은 공연을 했던지라 '또 공연을 하느냐'는 의미로 '또 해'라는 별명이 생겨났을 정도로 매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1995년 8월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 공연이라는 금자탑을 이뤘고 기념으로 2개월 간 전국 투어를 돌았다. 20대 여성층은 물론 30대 남성 직장인까지 몰려드는 김광석의 공연은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소극장 공연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1월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뉴욕 맨하탄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법정 스님으로부터 '원음'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둥근 소리라는 뜻. 예전부터 김광석 팬클럽 네임이었으며, 지금까지도 김광석 팬페이지 이름이다.
1996년 1월 5일 박상원이 진행하던 HBS '겨울나기'에 출연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을 부른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5] 사망
“한동안, 뭔가 모르게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을 때에요. 뭐, 정말 '그만 살까?' 이런 생각도 하고 그럴 때, 어차피 그래도 살아가는 거 좀 재밋거리 찾고 살아봐야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 하면서 만든 노랩니다. '일어나' 불러 드리면서 물러가겠습니다. 행복하십시오.”
작고 1년 전, 슈퍼 콘서트에서
1996년 1월 6일, 전날 아내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잠들었던 김광석은 새벽 4시 30분 마포구 서교동의 원음빌딩[7] 4층 자택 거실 계단에서 전기줄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향년 31세 349일, 그것도 32세 생일이 16일 남았던 날이었다. 그의 죽음에 관련해서 '사고사이다', '빚을 졌기 때문이다', '숨겨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아내가 죽였다' 등의 온갖 추측이 난무했는데, 경찰 발표에 따르면 김광석은 새벽에 술을 마시던 중 평소 우울증으로 자살한 것으로 발표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죽음에 여러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결국에는 자살로 결론이 났다.
사망 후 시신은 화장되었는데 이 때 승려들을 화장하면 나온다는 사리가 아홉 과[8]나 나왔다고 한다.
2017년 그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김광석(다큐멘터리)가 개봉하였다. 영화 및 김광석 의문사 의혹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지금까지 가수 ' 김광석 ' 에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긴글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