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백과사전의 블로그
[ 인물 ] -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본문
안녕하세요. 지식백과사전입니다. 오늘은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 박항서 ' 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입니다. 2017년부터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아시아에서도 축구 약체로 분류되던 베트남 국가대표팀을 맡고 난 이후부터, 2018 AFC U-23 컵(준우승)에 이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4위)에서도 마찬가지로 매 대회마다 팀의 역대 최고 성적을 갱신하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있다. 2018년 동남아 축구협회 대회인 스즈키컵도 10년 만에 우승시켰고, 직후 2019 AFC 아시안컵에서는 8강에 올랐다. 메인 전술은 5-4-1 카운터 어택으로 철저한 실리주의 축구를 추구한다. 한양대 체육학과 77학번 출신이다.
[2] 현역 시절
일본 유학생 출신인 아버지는 경찰 간부로 재직하다 부상으로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었고 어머니도 명문 진주여고를 나왔다. 부모는 고향에서 약방을 운영해서 크게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랐다. 축구를 굉장히 늦게 시작했는데 중학생때까지만 해도 장래희망이 군인이었고 축구는 논두렁에서 공차는게 전부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부모의 높은 교육열에 서울로 상경했으나 처음 목표했던 배재고 진학에는 실패하고 경신고에 진학했다. 교실에선 경신고 축구부원들이 공차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이 운명을 갈랐다. 축구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 그들 사이에 들어가 함께 땀흘리고 싶었지만 신장 165cm에 비쩍 마른체격, 축구부 경력 조차 없는 범생이를 받아줄 축구부는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축구를 하고 싶었던 그는 이경이 당시 경신고 축구부 감독과 절친한 사이였던 매형 뺵으로 겨우 축구부에 들어갔다. 이런 무경력자에게 기회가 올리 없어 6개월간 후보선수로 지냈고, 운동선수 학사관리가 미흡했던 그 시절 관행을 따라 제때 졸업을 못하고 1년을 꿇었다.
하지만 종일 축구공을 가지고 훈련하며 빠르게 실력을 키웠다. 1976년 고 3때 전국 청룡기 축구대회에서 결승골을 넣어 경신고에 우승컵을 안겼다. 한양대 2학년이였던 197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청소년 대표팀 주장을 맡아 우승을 하였다.
이후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실업팀인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하며 실업선수로서 데뷔하였으며, 곧바로 육군 축구단에서 군복무를 한 뒤 1984년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현 FC 서울)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며 프로무대에 데뷔하였다. 1985년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리그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86년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어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리고 호적상 만 29살, 실제론 만 31살이던 1988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축구를 늦게 시작했고, 리그 태동기라 실업과 군복무를 거쳤기 때문에 다른 역대 국가대표 감독들에 비해 짧은 4년의 프로선수 시절을 보냈다.
참고로 국가대표로 뛴 A매치는 단 1경기. 1981년 3월 한일정기전에서 전반 17분 교체 투입돼 73분간 뛴 게 전부다. 박항서가 지금도 가장 아쉬워하는 선수 시절 커리어라고한다.
[3]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코치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는 수석코치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했으며, 감독과 선수들 간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국 대표팀 선수단의 융화를 일구어내며 월드컵 4위의 성과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
황선홍이 조별 리그 첫 경기인 폴란드전 때 선취골을 넣고 안기러 간 사람이기도 하다. 진상은 게임 시작 전에 황선홍이 골을 넣으면 박항서 코치를 안아준다고 농담 삼아 말을 했는데 골을 넣어버려서... 옆에 있던 히딩크는 섭섭해 했다고.3차전에서 지성이가 안아줌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16강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이 결승 골든골을 넣은 뒤 환호하다가 이내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라운드로 향할 때 다가와서 격하게 환영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예의 그 펀치 세레머니를 보여준 건 덤
[4]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 감독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허정무호(U-23)▶박항서호▶김호곤호
월드컵 이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을 맡으며 생애 처음으로 감독직을 맡게 된다. 하지만 당시 하늘을 찌르던 대표팀의 사기를 등에 업고도 겨우 동메달(…)을 땄다는 이유로 AG 이후 해임됐다. 월드컵과 올림픽에 비하면 우승 가능성이 확연히 높은 대회에서, 그것도 대한민국 안방에서 열린 대회임에도 금메달을 못 땄다는 점이 컸다.
북한
무
0 : 0
-
친선경기
아랍 에미리트
승
1 : 0
친선경기
쿠웨이트
승
2 : 0
몰디브
승
4 : 0
상대 자책골(2)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조별리그
오만
승
5 : 2
이천수(2골)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조별리그
말레이시아
승
4 : 0
김은중(2골)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조별리그
바레인
승
1 : 0
이동국(PK)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8강
이란
무
0(3) : (5)0
-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준결승
태국
승
3 : 0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동메달 결정전
9전 7승 2무의 엄청난 전적을 기록했으나, 아시안 게임 준결승에서 이란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여 우승은 좌절되었다.
이 대회에 박항서가 지휘했던 스쿼드를 보면 참으로 화려한데, 월드컵 4강 멤버 중 박지성, 이천수, 최태욱, 현영민이 발탁되었고, 비록 월드컵 본선엔 함께하진 못했지만 이동국과 김용대는 히딩크호에도 꾸준히 뽑혔던 멤버였으며, 김은중, 김두현, 김동진, 최성국, 박용호, 조병국 등이 합류했고, 더군다나 와일드카드 3명 중 2명을 또다른 월드컵 4강 멤버중 하나인 이운재와 이영표로 선발하는 위엄을 선보였다. 그만큼 군 면제는 둘째치고 무조건 우승만 노리고 참가한 대회였으니 부진한 성적인 건 맞다.
조별예선에서 몰디브와 말레이시아를 각각 4:0으로, 오만을 5:2로 완파한데 이어 8강에서 바레인까지 꺾었지만, 준결승에서 이란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금메달이 좌절되었고, 3-4위전에서 태국을 3:0으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하는 데에 만족해야만 했다. 참고로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는 박종환 감독 체제로 금메달을 받았었기에 16년만의 안방 금메달을 엄청 기대했던 분위기였다. 월드컵 탈락의 한풀이를 하러 왔던 이동국은 빼도 박도 못하고 시즌 후 군대 확정. 한국을 꺾고 올라간 이란이 결승에서 일본까지 격침시키고 금메달을 차지해 아쉬움을 더했다.
하지만 마냥 박항서 책임으로 묻기는 어려운 게, 당시 축구 협회는 2002월드컵에 올인 하느라 이 대회 준비를 소홀히 했다. 연령별 상비군을 확보해 두긴 했지만, 정작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없었다. 이 무슨...결국 대회 3달을 앞두고 부랴부랴 아시안 게임 대표팀이 꾸려졌고, 당시 월드컵 엔트리 탈락 후 상심하여 방 구석에서 소주만 빨고 있던 이동국도 차출 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 타임 라인을 살펴보면 박항서 감독이 얼마나 축구협회로부터 홀대를 받았는지 잘 알 수 있다. 2000년 12월 20일 거스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에 부임하고, 2002년 6월 29일 터키와 3 4위전을 끝으로 지휘봉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8월 6일 아시안 게임을 약 두달 앞두고 박항서 감독이 코앞으로 다가온 아시안 게임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 대표팀을 이끌기로 졸속 계약을 맺는다.
지금이야 홍명보처럼 올림픽 대표와 국가대표 감독을 겸임하거나, 울리 슈틸리케와 신태용처럼 따로 운영하는 등 장기적으로 대표팀의 세대교체를 염두에 두고 각급 대표팀을 운영하지만 저때는 아예 사전에 코칭 스태프를 꾸리지도 않았다는 점을 눈여겨 보자. 즉 히딩크 후광을 업으려고 박항서, 정해성 두 사람을 각각 감독과 코치로 선임한 정황이 뚜렷하다. 그나마 정해성은 이를 고사했다.
그리고 9월 7일 남북축구대회가 열리는데 축협은 방한한 히딩크 감독을 기술고문 자격으로 대표팀 벤치에 앉히는 미친 짓거리를 저지른다. 9월 9일 박항서 감독은 협회와 연봉 문제로 이견차를 좁히지 못해 아시안게임까지 무보수로 맡은 뒤 다시 논의하자고 협회에 제안했다라는 충격적인 성명서를 발표한다. 관련기사
한마디로 보수 등 기본적인 계약내용조차 정하지 않고 일단 앉혀놓고 봤다는 얘기. 이에 대한 축협의 반응은 협회에 대한 명백한 항명이라며 퇴출을 시사했다. 관련기사 아 씨바 할말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동메달은 핑계고 박항서 감독이 비주류 대학 출신인 것과 축구협회 사이의 불화 때문에 경질된 것이라는 주장도 일었다.
명단만 보면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외화내빈이나 다름없는 팀이었다. 우선 대표팀의 엔진 박지성은 소속팀과 차출 문제로 8강전부터 합류했다.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 유상철이 빠지고 히딩크의 황태자 고종수는 부상으로 대표팀 중원을 신인 김두현이 맡게 된다. 부동의 공격수 황선홍도 빠지고 그 자리를 메꾼 이동국도 월드컵 엔트리 탈락 여파로 멘탈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심지어 홍명보, 김태영(1970), 최진철 3백 수비라인을 통째로 뜯어버리고 새 얼굴 4백으로 바꿔 이식한 팀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세대교체를 이룬 석달짜리 대표팀 치고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아시안게임은 연령별 대회에 피파 주관이 아니며, 아시아 한정으로 치뤄지는 대회이기에 여러모로 좋은 성적을 기대해볼만한 대회였고, 한국이 좋은 전력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괜찮은 전적을 거둔만큼 아쉬움은 남지만, 좋은 성적이라고 하기엔 다소 애매한 부분은 있다.
[5] K리그 코치
그 후 포항 스틸러스에서는 코치를 거쳐 전남 드래곤즈에서는 기술고문을 맡았는데, 애초에 포항 코치를 그만두고 전남의 감독에 올 예정이었으나, 허정무 감독이 당시 대표팀 수석코치를 그만두고 감독으로 오는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치면서 기술고문은 사실상 명예직 수준이었다.
[6] 경남 FC 감독
2005년에 경남 FC의 창단 감독으로 취임했다.
첫 시즌인 2006년에는 7승 5무 14패를 기록하면서 12위로 시즌을 마쳤다.
2007 시즌, K리그에서 경남을 4위까지 끌어올리면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플레이오프에서 5위 포항을 만났고, 홈에서 1-1로 비겼으나 승부차기에서 패하면서 아쉽게 탈락했다.
4위라는 성적에도 불구하고 구단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지금까지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감독인 '박항서' 감독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긴글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