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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일 ] - 어린이날

돌아온 지식백과사전 2020. 5. 5. 01:16

안녕하세요 지식백과사전입니다. 오늘은 기념일인 ' 어린이날 ' 에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개요

어린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계 여러나라에서 정하고 있는 기념일.

 

 

 

[2] 대한민국의 어린이날

아동복지법 제6조(어린이날 및 어린이 주간)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보호의 정신을 높임으로써 이들을 옳고 아름답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나도록 하기 위하여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하며, 5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를 어린이주간으로 한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우리가 자라면 나라의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 어린이날 노래 / 작사: 윤석중 / 작곡: 윤극영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고, 어린이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 미래 사회의 주역인 어린이들이 티없이 맑고 바르며, 슬기롭고 씩씩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어린이 사랑 정신을 함양하고,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자 제정한 기념일로, 매년 5월 5일이며, 법정 공휴일이다. 이날에는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행복을 꾀하는 취지의 기념행사가 전국 각지에서 열린다.

 

 

 

[3] 역사

어린이날 탄생 이전의 어린이들은 어른으로부터 어린이라고 불리지도 못하고 '애기, 애새끼, 어린것, 아이들, 애, 애들, 계집애' 등으로 불렸으며, 어린이들에게 의무교육이 시행되지도 않았고 교육을 받는 어린이도 많지 않았다. 대개의 어린이들은 농사일을 하거나 도시로 나가 공장에서 일을 했다.

방정환이 생각한 ‘어린이’는 티 없이 맑고 순수하며 마음껏 뛰놀고 걱정 없이 지내는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의 현실에서 어린이들이 그런 이상에 다다르기는 만무해보였다. 그래서 현실이 가혹할지라도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관련 운동을 많이 했는데, 그 일환으로 어린이날이 만들어지게 된다.

 

 

 

[4] 어린이날의 탄생

1919년에 3.1 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일깨워 주고자 진주를 시작으로 각 지역에 소년회가 창설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도요 대학교 아동 미술과에 입학한 방정환은 아이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눈을 뜨고 1921년 김기전, 이정호 등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펼쳤다. 그러고는 아이를 인격을 가진 한 사람의 독립된 사회 구성원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로 ‘어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1922년 4월 각 소년운동 단체, 신문사 등이 모여 논의한 결과 어린이날은 ‘새싹이 돋아난다’는 의미로 새싹이 돋아나는 5월 1일을 어린이 날(소년일)로 정하고 그 해에 천도교소년회에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였다.

이듬해(1923년) 3월 16일 소파 방정환을 비롯한 일본 유학생들이 소년운동 활성화를 돕기 위하여 일본 도쿄에서 색동회를 발족하였고, 같은 달에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했다. 4월 17일에는 색동회는 각 소년운동 단체들을 조직하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만들었다.

1923년 5월 1일 색동회 창립과 동시에 색동회를 중심으로 방정환 외 8명이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첫 어린이날 행사를 천도교당에서 크게 열었다. 기념 행사의 표어는 “희망을 살리자, 내일을 살리자.”, “잘 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였으며, 어린이가 미래의 희망임을 강조하였다. 기념식 후 200명의 소년들이 경성 시내를 4구역으로 나누어 집집마다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장을 배포하였다. 어린이날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 어린이 운동가들은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하는 구호를 외치며 아이들의 가장 간절한 희망사항 10가지를 담은 '어른에게 드리는 선전문'을 배포했는데, 그 속에는 '이발이나 목욕을 때맞춰 해주세요',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해주세요', '산보와 소풍을 가끔 시켜주세요' 같은 것도 있었다. 이런 외침도 어린이날만 지나면 잠잠해졌다고 하니 90여 년 전의 아동 인권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알 수 있다.

 

 

 

[5] 광복이후

이후 일제의 탄압에서 비롯된 이런 저런 사건을 거치며 없어지나 했지만,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어린이를 존중하는 마음을 살리기 위해 《어린이》가 다시 발행되기 시작했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의해 일제에 의해 탄압받고 중단되었던 어린이날을 부활시켰다.

해방 이후 첫 기념식은 1946년 5월 첫째주 일요일인 5월 5일 오전 11시부터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어린이날 전국준비위원회와 어린이날 서울시준비위원회 공동 주최로 거행되었는데, 천도교소년회, 조선소년운동중앙협의회 등 18개 소년 단체에서 수천 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4명의 남녀 어린이가 다시는 집도 말도 빼앗기지 않고 새날 새 조선의 주인으로서 열심히 배우겠다는 「소년소녀의 선서문」을 낭독했다.

우리는 왜족에게 짓밟혀 말하는 벙어리요 집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집과 우리 글을 찾기로 맹세합니다.
우리는 새 조선 건설의 일꾼이요 새날의 임자인 것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집도 빼앗기지 않고 말도 잃지 않기로 굳게 기약합니다.
우리는 왜적으로 해서 다른 나라 어린이보다 너무도 뒤졌습니다. 우리는 배우고 또 배워서 다른 나라 동무들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조선의 어린이인 것을 잊지 않고 단단하고 끈끈하게 뭉치겠습니다.


- <현대일보>, 1946년 5월 6일

 

 

 

 

지금까지 기념일인  ' 어린이날 ' 에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긴글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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